직업인으로서, 난 어떤 근육이 발달했을까?

직업인으로서, 난 어떤 근육이 발달했을까?

ㅍㅍㅅㅅ 2021-04-20 15:46:04 신고

와~ 세상에!

첫인사도 하기 전, 주책없이 감탄사가 먼저 튀어나와 버렸다. 혹 초면인 선수에게 실례가 되진 않았을까? 서둘러 사과부터 건넸다.

미안해요. 제가 철이 없죠? 직업 운동선수를 이렇게 가까이 만난 적이 처음이라서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권투와 리듬체조. 직업 운동선수의 몸을 맨눈으로 이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었다. 이 시국만 아니었다면 가끔 몇몇 종목의 경기장에 직접 가기도 했었다. 경기장 밖에서 운동선수를 만난 적도 있다. 하지만 겹겹이 옷을 입은 채였다. 그 안에 이렇게 놀라운 실체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코로나 19 여파로 각종 대회가 취소되면서 ‘선수들의 시계’가 멈췄다. 그 여파로 평소보다 군살이 붙었다지만, 일반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매만진 근육이 아니었다. 흘린 땀방울의 개수만큼 정직하게 자리 잡은 근육. 같은 운동선수라 해도 종목의 특성에 따라 근육의 모양과 질은 전혀 달랐다. 가녀린 줄만 알았던 리듬체조 선수의 몸에는 길고 유연한 근육들이 있었다. 영민하게 주먹만 휘두르면 되는 줄 알았던 권투선수의 몸에는 짧고 탄력 있는 근육들이 있었다.

촬영 내내 군더더기 없는 근육과 그 근육이 만들어 내는 몸놀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챔피언‘을 향해 한길로만 달려가는 선수들의 몸. 승부라는 전쟁에서 그들의 몸은 자체로 무기였다. 운동을 알지 못하는 운.알.못의 눈엔 그저 언제라도 신호가 떨어지면 발사될 상태처럼 보였다.

그 근육을 천천히 보고 있으니 종목은 달라도 우린 어쩌면 모두 ‘인생‘이라는 경기장 위에 오른 선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인생을 사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 나고 순위가 매겨지니까. 촬영에 집중한 선수들을 지켜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직업인으로서 난 어떤 근육이 발달했을까?

방송국 언저리에서 서식한 지 십여 년. 가깝게는 컨펌 내릴 팀장님부터 공들여 섭외한 출연자, 티비 너머의 얼굴 모를 시청자까지. 난 누군가를 설득하는 게 일이다. 그래서 혀 근육과 얼굴 근육이 직업적으로 발달했다. 딸깍 조명 스위치를 올릴 때처럼, 자연인 상태에서 직업인인 나를 소환해야 할 때는 처져 있던 입의 안과 밖의 근육, 그리고 얼굴의 근육부터 끌어올린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어떤 말을 건네야 상대가 마음을 열까? 고민하고 분석한다. 웃상으로 보이게 일부러 한껏 올린 입꼬리, 호감으로 보이기 위해 장착한 눈웃음, 입에 발린 달콤한 말, 긴장을 풀어줄 가벼운 농담과 달달한 칭찬 등등 생활인일 때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근육들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각 상대에 맞는 근육으로 입과 얼굴을 세팅한 후 설득을 시작한다. 무표정했던 얼굴이 돌변한다. 캄캄했던 방에 조명 빛이 채워지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바짝 마른 나뭇잎처럼 건조한 목소리에 발랄한 생기가 돈다. 저 밑바닥에 고여 있는 알량한 에너지를 끌어 올린다. 먹고 살기 위해.

영혼까지 끌어올린 미소

언젠가 인터뷰 후 내용 정리를 위해 녹음한 파일 켰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음성 파일 속 나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 가증스러워서. 내가 이런 목소리로 사람을 대한다고? 이렇게 두꺼운 철판을 깔고 알랑방귀를 뀐다고? ‘현타’가 밀려왔다.

나란 인간은 이중인격자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잠시 일로 만난 사이는 한없이 따뜻하고 살갑게 행동했다. 반면, 평생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무뚝뚝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었다. 근데 짬이 차고 보니 그건 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일부러 키운 ‘생존 근육‘이란 걸 인정하게 됐다.

어느 직업이든 한 분야에서 일정 기간 이상 버틴 자들에게는 아름다운 근육이 자리 잡는다. 경험이 만든 근육. 그 근육은 무너지고, 흐트러지고 싶을 때마다 날 잡아 준다. 말이 아닌 글로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됐다. 그때부터 ‘근손실’ 아니 ‘글 손실’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다. ‘글 근육’을 쌓기 위해 글감을 찾고 틈틈이 메모한다. 그리고 묵은 게으름과 싸워가며 부지런히 글을 쓴다.

아마 영원히 닿지 못할 완성도에 대한 고민은 좀 미뤄두고, 멈추지 않기 위해 써 내려간다. 뭉치고, 다치고, 찢어지고, 붙고,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탄탄해진 근육을 가지게 된 직업 운동선수들. 그들처럼 나도 언젠가 야무지고 굳센 ‘글 근육’을 가진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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